<서울에 내 방 하나> 내가 어른이 된 것은 내가 제일 늦게 알았지

2020. 9. 17. 07:37문화/책

에세이를 그다지 즐겨읽는 편이 아닙니다.

비슷비슷한 제목에 대동소이한 표지를 가진 에세이 서적이 가판대에 범람하는 현상이 싫고요.

다 괜찮아. 괜찮아. 하는 식의 일시적인 힐링만을 전달하는 서적인 경우도 있었고

크게 관심 가지고 싶지 않은 남의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만 줄줄이 써놓은 경우도 있었거든요.

 

'에세이 서적이 수준떨어진다' 같은 단순무식한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일단 팩트인게 에세이 작가분들은 하나같이 저보다 더 재미있고 좋은 글을 쓰시니까요.

 

그냥 제 취향이 아니다 이겁니다. 저와 맞지 않는 장르예요.

(그러면서 티스토리에 에세이 쓰고ㅇ)

 

하지만 반동분자인 저의 뒤통수를 때려버리는 에세이가 있었습니다.

권성민 PD의 두 번째 에세이집 '서울에 내 방 하나' 입니다

 

 

 

 

'서울에 내 방 하나' (이하 서내방) 은 놀라울 정도로 일관적입니다.

제목에 굉장히 충실하게, 고등학교 시절 자취생활부터 집을 마련하기 까지의 자립 과정을 그려내면서

동시에 자립을 하면서 다져온 생각과 마음의 굳건해진 땅까지 보여줍니다.

 

'서내방' 을 읽으면서 생각난 문장이 있습니다.

 

 

출처 : 웹툰 '미생'

 

권PD님은 어린 친구...는 아니지만 (저보다 형님이십니다;; 어린 친구는 저예요.) 

'취해있지 않다'는 말이 어울리는 분입니다.

 

자연스럽고 말랑말랑하지만, 만져보면 단단한 뼈가 느껴지는 문장.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부터 놀라울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자신의 족적을 뽐내려 하지 않는 담담함.

치열함 속에서도 삶의 작은 즐거움과 감각을 잃지 않는 여유.

숨막히는 방송업계에서 꾸준하게 콘텐츠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따스함.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글은 곧 사람을 비춘다고 하죠.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이 쓴 한 권의 에세이에 담겨있다면

그 사람은 따뜻하지만 단단하고, 여유를 느낄 줄을 알면서 담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맘에 들었던 문장들을 발췌하겠습니다.

 

P.20
자취하는 남자가 이상형이라던 그 친구도 그저 능숙한 살림꾼을 말한 것은 아니었을 거다. 크고 작은 문제를 혼자서도 해결하고 책임질 수 있는 독립된 인격에 대한 얘기였겠지.
P.32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건 조금 귀찮은 만큼 부드러워지는 일이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귀찮은 게 싫어 부드러움을 잊게 될 때가 많다.
P.70
내가 어른이 되는 건 아마 내가 가장 늦게 알 것 같다.
P.90
- PD란 무엇인가. 다른 건 모르겠고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 설익은 초심을 본 사람들이 놀려도, 그 작은 민망함을 끌어안는다면 정말로 큰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가는 길은 피할 수 있을 테니.
P.96
지금도 좋은 영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영화는 물론 많지만, 실은 너무 많다. 하나를 기억하고 충분히 주억거리기도 전에 또 좋은 영화가 나온다. 입도 짧으면서 뷔페에서 욕심을 부려 헛배만 더부룩한 기분이다. 적당한 결핍 덕분에 오래오래 곱씹으며 깊이 소화할 수 있던 그때의 작품들은 참 운이 좋았다.
P.104
"여러분 되게 바쁘죠? 그래서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영화, 뭐 그런 리스트 만들어놓고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해치워야지, 그렇게 쟁여 놓고 있죠? 그런데 너무 마음 쓸 필요 없어요. 그런 날 영영 안 와요."
P.117
하지만 어떤 정치적 올바름, 개인주의적 존중 역시 환경의 산물이다. 그런 매너를 배우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 기준이 높아진 것이 꼭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P.120
긴 머리의 남자도, 장애인도, 피부색이 다른 이도 혹은 그 어떤 낯선 존재도, 신기할 수 있다. 자기도 모르게 어, 하고 눈길이 가는 거야 어쩌겠는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 감정을 담아 지속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종국에는 낯설어하지 않으면 좋겠다. 어, 하고 눈길조차 안 갈 만큼 그러려니 하는 존재들이 되었으면.
P.149
종종 방송에서 물의를 일으킨 장면들은 이렇게 둔감해진 탓에 탄생한다. 타성에 젖는 것이다.
P.171
공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순간 일기란 말로 슬그머니 도망칠 수 없다.

 

 

사서오경에 '중용'이라는 경전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덕목 중에 하나로 꼽히던 덕목이기도 했고요.

경전으로 따로 나올 정도로라면. 옛 사람들이 입에 침에 마르도록 얘기했던 덕목이겠죠. 

지금 시대에 이런 책이 나온다면 '미안하다 이거보여주려고 어그ㄹ' 정도...

 

중용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지만,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상태 입니다.

 

에전에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시간에 배울 때는 크게 어렵지 않은 개념이었습니다. 

시험지에 쓰여있는 텍스트를 읽고

대충 이거 답은 중용이겠거니...하는 키워드를 찾아내고, 답을 적으면 됐거든요.

하지만 역시 인생은 실전이라고 했나요.

 

사회 생활을 조금 했을 뿐인데, 중용이라는 덕목이 무엇보다 어렵게 느껴집니다.

작은 물결에도 기울어지고

내 마음을 조금 채웠다 싶었을 때면, 철썩 부딫히는 파도에 흔들려 채운 마음을 흘려버리게 되고

가끔은 너무 높이 차오른 마음 속 감정에 더부룩한 가슴으로 살곤 합니다.

아직도 비우고, 채우고, 균형을 잡는 마음이 부족한 탓이죠.

 

권성민 PD의 에세이는 중용에 저보다 가깝게 살고 있는 한 사람의 태도를 담담히 보여주는 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꾸밈이 없기에 균형잡힌 모습이 더 돋보이는 이야기들.

소소한 재치를 보여주면서도, 한 글자 한 글자를 쓰기 위해 짊어졌던 고민의 무게가 느껴지는 문장들.

 

사소한 물살에도 돌멩이를 이리 굴리고, 울퉁불퉁 모나게 물살이 흘러가게 하는 얕은 여울이 있다면

때론 송사리가 수면 위로 튀어오르고, 모래무지가 몸을 묻을 수 있는 깊은 바닥을 가진 개울이 있습니다.

제가 여울이라면 권PD님은 깊게 흐르며 더 많은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개울이 아닐까 합니다.

 

왠지...이런 비유를 쓴 걸 권PD 님이 보면...

"헤엄치다 지친 개구리가 튜브 끼고 놀 수 있는 곳도 여울이고, 푸른 하늘 운동장을 돌다가 내려온 참새가 목을 축일 수 있는 곳도 여울인데? 헤엄칠 힘이 있는 생명들만 받는 매정한 개울보다, 오는 사람 누구든지 촉촉하게 만들 수 있는 여울이 더 좋아"

같은 식으로 반론하실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건 뭘까요 ㅋㅋㅋㅋㅋㅋㅋ

글을 보면 항상 통념적인 것들을 살짝 살짝 비틀어내시더라고요.

최소 꽈배기 장인.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