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스터디

2018. 4. 16. 00:53공부/개인단상

 작년 7월부터 예능PD 스터디를 만들어 하고 있다. 4명으로 시작한 스터디는 6명으로 늘어났다. 간혹 게으름 부리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모두 과제를 잘 하면서 PD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다. JTBC 드라마하우스, SBS, tvN, JTBC, EBS, MBC, Mnet까지 여러번의 공채를 보았다. 서류는 곧잘 붙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필기에서 낙방을 했다. tvN은 필기 붙고 PD오디션 갔다가 낙방했다. 결과에 상관없이 열심히 공부했다. 3년을 버텨야 겨우 붙는다는 언시의 3분의 1을 채워가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스터디와 언론고시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공부가 힘들고 시험문제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그딴건 큰 문제가 아니다. 가장 큰 고민은 '내가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계속해서 시사 상식을 외우고, 모니터링을 하고, 기획안을 쓰고 작문을 썼다. 하지만 뭔가 내가 과제들에 대해 전심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달간 과제를 해오던 관성에 따라 단순노동을 하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내공을 강화하는 수단인 스터디가 나 자신을 오히려 매너리즘에 빠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매너리즘을 깨달은 것은 MBC 필기시험, 그리고 필기시험이 끝나고 K선배와 나눴던 함께한 대화였다. 사실 난 필기시험에 꽤나 자신이 있었다. 스터디 전원이 박수를 쳤던 재미있는 글들 몇 개를 머리 속에 집어넣고 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학, 경제학, 철학 연계전공을 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폭넓게 쌓아놓았고, 시사상식 취합본으로 공부도 꽤나 열심히 해놓았으니까. 떨어질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5월달 최종면접에서 최승호 사장을 보며 큰 소리 칠 상상을 하며 시험을 보았다. 상식시험을 풀고, 작문시험을 보았다. 작문 시험 제시어는 '세상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생각' 이었다.


 코웃음 쳤다. 이렇게 우라까이(예전에 써놓은 글에 제시어만 적절히 삽입하여 언시 작문을 쓰는 방법)하기 쉬운 제시어라니. 나는 내가 생각해도 잘썼다고 생각한 글을 신나게 써내려갔다. 1쪽이란 분량에 딱 맞게 쓴 다음 자신있게 냈다. 같이 시험 본 K후배와 우연히 만난 H선배와 양꼬치에 맥주를 간단히 먹었다. 먹고 나오는데 마침 같은 날 시험을 본 K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만나서 쭈꾸미 숙회에 소주를 한 잔 하면서 필기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형은 "이 문제는 우라까이를 하면 안되는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 자신이 언시 작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PD 작문의 주된 정공법은 '우라까이'가 맞다. 미리 좋은 글을 여러개 써놓은 다음 제시어에 맞춰서 살짝살짝 바꿔서 쓰는 방법.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고 안정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우라까이는 출제자의 의도와 맞았을 때 사용할 수 있다. MBC 작문 시험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묻는 문제였지, 웃기고 재미있는 작문을 보자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나의 오만에 대해 반성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라는 화두는 그 이후로 나를 계속 괴롭혔다. 나만이 가진 독창적인 사고는 무엇일까, 과연 독창적인 사고가 존재하기는 한 걸까, 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유일무이한 사고가 어디에 있냐고. 하늘 아래 새로운 사고는 없다고. 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고민이 또 생겼다. 새로운 사고는 없지만 기존의 사고를 나만의 방식으로 조합할 수는 있을텐데. 그건 뭘까. 나는 어떻게 기존의 생각을 조합할 것인지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다.


 콘텐츠를 만들겠다면서 막상 '나 자신의 생각'이 없다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 계속 스터디를 해봤자 내실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유행하는 여행, 먹방, 쿡방, 소확행, 케렌시아, 이딴걸 다 꼬라박아서 기획안을 만든다고 해봤자 재미있는 콘텐츠가 나오지는 않는다. 콘텐츠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이 없다면 그 콘텐츠는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주관 없이 PD가 되겠다고 몇 년간 바득바득 애쓰느니, 일반기업에 취직해서 주택청약적금을 더 많이 붓는 것이 훨씬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화요일에 스터디를 그만둘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는 작문을 쓰고 기획안을 쓰는 것 보다 나 자신의 생각을 정제하여 표현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언시를 통과할 수 있는 스킬이 아니라 PD에 걸맞는 내공이다. 나는 나 자신의 생각을 보다 굳건하게 건축해 나가야 한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더 이상 '열심히 산다'는 환상에 빠져선 안된다. 나 자신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행위를 통해 그 필요한 것을 채울 수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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