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왜 사람들은 재미도 없는 러닝을 하는 걸까?

2020. 9. 8. 23:40문화/책

대략 4-5년 전부터 였을까요. 신촌, 강남, 기타 한강변을 중심으로 러닝크루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3년 전 쯤부터는 대학교 마다 러닝 동아리가 생겼고, SNS에는 다양한 러닝크루의 홍보물이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이제는 공원에 나가기만 하면 러닝크루 멤버들이 보입니다.

나이별로, 성별로, 실력별로 대여섯 명씩 짜여진 달리기 모임들이 간간히 보이곤 하죠.

 

나이를 불문하고 달리기는 우리 곁에 있는 친근한 운동이 되었습니다.

'러닝'이라는 외국어 표현을 통해 꽤나 힙한 운동으로 자리잡기도 했고요.

 

 

 

 

저 역시도 달리기를 합니다.

아니다, 힙한 표현을 쓸래요. 러닝을 합니다.

오늘도 퇴근을 하고 달리기를 했고

비가 오지 않으면 새벽에 출근전에 달리기를 하곤 합니다.

 

달리기를 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보람? 성취감? 자아성장? 아닙니다.

 

달리기는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달리기는 재미가 없습니다.

축구처럼 전략을 짜고, 사람들과 합을 맞추면서 점수를 따는 '경쟁'의 재미도 없고

격투기처럼 더 효율적인 자세를 고민하고, 타격능력과 순발력을 키우는 '강해짐'의 과정도 없습니다.

 

달리기는 지루하고, 피드백이 적은 운동입니다.

심지어 컨디션의 영향이 크기 때문에 어제 30분만에 달리던 거리를, 오늘은 35분만에 겨우 뛸 수도 있지요. 

 

물론 의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달리기를 하면서 호흡을 극한까지 몰아세우고, 등을 땀으로 흠뻑 적시고 나면 몸과 기분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뛰기 전과 뛰기 후의 사람은 거의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죠.

하지만 이런 것은 유산소운동의 효과입니다. 재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달리기를 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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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서머싯 몸은 `어떤 면도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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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름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답을 줍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 덕후로 유명합니다.

보스턴 마라톤을 비롯하며 철인 삼종경기, 울트라 마라톤 등 수도 없이 많은 달리기 경주를 완주한 사람이죠.

달리기에 대해 쓴 하루키의 수필집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는

하루키의 달리기 사랑이 듬뿍 묻어있습니다. 

 

좋았던 문장들을 몇 가지 발췌하겠습니다.

 

P. 26
그런 의미에서 소설을 쓰는 것은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것과 비슷하다. 기본적인 원칙을 말한다면, 창작자에게 있어 그 동기는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형태나 기준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다.

 

P. 34
달리는 거리가 늘어감에 따라서 체중도 줄어갔다. 2개월 반 만에 7파운드가 줄고, 배 둘레에 조금씩 붙기 시작한 군살도 빠졌다. 7파운드라고 하면 3킬로그램 정도 된다. 정육점에 가서 3킬로그램의 고기를 사서 손에 들고 집까지 걸어 돌아오는 걸 상상해보기 바란다. 아마도 그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의 무게를 몸에 붙이고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하면 꽤 복잡한 기분이 든다.

(아니 이건 다이어트 동기부여)

 

P.35
그런 까닭에 하루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P.60
달리는 것에는 몇 가지 큰 이점이 있었다. 우선 첫째로 동료나 상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특별한 도구나 장비도 필요 없다. 특별한 장소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달리기에 적합한 운동화가 있고, 그럭저럭 도로가 있으면 마음 내킬 때 달리고 싶은 만큼 달릴 수 있다.

 

P.66
열 명 중에 한 명이 단골이 되어준다면 경영은 이루어진다. 거꾸로 말하면 열 명 중 아홉 명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다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 '한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마음에 들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경영자는 명확한 자세와 철학 같은 것을 기치로 내걸고, 그것을 강한 인내심을 가지고 비바람을 견디며 유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P.103
사정을 들은 주유소의 아저씨가 화분의 꽃을 꺾어서 작은 꽃 다발을 만들어 나에게 건네준다. "수고했어요. 축하합니다!"

 

P.113
근육은 잘 길들여진 소나 말 같은 사역 동물과 비슷하다. 주의 깊게 단계적으로 부담을 늘려 나가면, 근육은 그 훈련에 견딜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간다.

 

 P.123
장편소설을 쓴다고 하는 작업은 근본적으로는 육체노동이라고 나는 인식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자체는 두뇌 노동이다. 그러나 한 권의 정리된 책을 완성하는 일은 오히려 육체노동에 가깝다.

 

 

하루키의 수필은, 달리기를 소설쓰는 작업과 굉장히 밀착시켜 이야기합니다.

달리기와 글쓰기는 비슷합니다.

장비도 크게 필요없고요, 공간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연속되는 프로세스를 끊임없이 견뎌야 하는 작업입니다.

 



러너는 신발을 신고, 작가는 펜을 들고

러너가 한 발 한 발을 딛을 때 작가는 한 단어씩 써내려갑니다.

러너가 호흡이 가빠져도 발을 멈추지 않듯, 작가도 글이 나오지 않더라도 한 글자 한 글자를 짜냅니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축구처럼 패스를 받아줄 동료 선수도 없고,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완주해야 합니다.

 

혼자서 해내야 하는 운동인 만큼, 정직한 운동입니다.

뛰는 시간은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이고, 달리는 거리는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거리가 되죠.

모든 운동의 시간이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책임질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오롯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일도, 사랑도, 돈도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가 없죠.

그래서 달리기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고

한 번 실수했다는 이유로 기회마저도 박탈해버리지만

 

달리기는 내가 견디는 만큼 책임지고 뛸 수 있고

오늘 조금 부진하게 뛰더라도, 다치지만 않으면 내일 다시 뛸 수 있으니까요.

 

 

재미없는 달리기.

그런 달리기가 어떻게 사람들을 매혹했을까요.

 

한 발 한 발을 스스로 딛으며 달리는 시간을 스스토 책임져야 한다는 것.

내가 달리는 시간을 통제할 수 있고,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쓸 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재미없는 달리기를

역설적으로 가장 의미있고 흥미로운 운동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