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선언

2018. 6. 20. 00:03공부/개인단상

 다니던 직장에서 몇 주전 대표 면담을 했다. 부서를 이동하는 조건으로 정규직 전환을 시켜준다고 했다. 

오케이 했다. 영상으로 정규직 얻기 힘든 마당에 별 어려운 조건 없이 정규직이라니. 조금 생각해 보겠다고 간을 보긴 했지만 주말이 지났을 때 부서를 옮기겠다고 이야기했다. 일주일 후, 난 갑자기 부서를 이동했다.


 이동한 부서는 똑같이 영상을 다루는 곳이었지만 하는 일은 완전히 달랐다. 예전 부서는 소셜 스낵콘텐츠를 만드는 부서였다.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획해야 했고, 이슈가 터지면 이슈를 이용하여 웹 예능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다. 반면에 옮긴 부서는 영상 뉴스를 만드는 부서이다. 사건이 터지면 달려가서 찍고, 편집하고, 자막넣어 올리는 것이 일이다. 아이디어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부서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디어를 생각해선 안되는 부서다.


 이동한지 약 3주가 되었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불행과 불안함을 느꼈다. 새 부서에서는 '뉴스를 빠르게 취재하여 빠르게 올린다'는 기성 미디어의 법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비디오머그, 프란, 스브스뉴스등이 시도하는 뉴미디어 뉴스콘텐츠와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기존 부서에서 '어떻게 자막을 넣으면 재미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구성하면 새로울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이런 일을 하면서 내가 성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적당히 부장들 비위 맞출만한 자막을 넣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다. 


 빠른 취재를 중시하는 만큼 워라밸은 지켜지지 않았다. 밤 11시에도 로이터 영상이 올라오면 편집을 해야했다.  근무시간이 지나서도 편집을 하고 취재를 나가야했다. 방송사는 카메라 기자와 뉴스편집PD가 따로 있지만, 중소 언론사인 만큼 두 가지 일을 내가 같이 해야했다. 만약 내가 그동안 기자를 꿈꿔왔다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PD를 생각하던 나에게 '워라밸 최악 + 성장하기 힘든 단순 노동'은 견디기 힘든 조건이었다.(사실 기자라고 해도 불만은 많았을 것이다. 레거시 미디어의 관성을 그대로 따라하는 기자가 되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심층적인 취재를 하고자 한다면 펜기자가 영상기자보다 훨씬 유리하다.) 정규직이 된다고 해서 나에게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10대부터 20대 후반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하던 고민중 가장 큰 고민은 '일'에 대한 고민이었다. '직장은 꾸역꾸역 참아내고 취미생활로 즐거움을 찾는다'는 통념이 싫었다. 노동은 인생에서 상당히 긴 시간을 차지하는 것이고, 그 노동이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건인지 회의가 들었다. 약 1년 6개월간의 창업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확신을 가졌고, 그래서 PD가 되어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언론고시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상황은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성장할 수 있는 일'의 대척점에 서있다. 

3주 동안의 장고 끝에 결정을 내렸다. 7월 중반에 인턴기간이 끝나고, 정규직 계약서를 쓰지 않기로 했다.  


인턴이 끝나면 월급이 들어올 구멍도 없어질 것이고, 나는 취준 백수가 될 것이다. 하반기 공채를 준비하면서 경제적인 난관과 취준의 권태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작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공채에서도 미역국을 신나게 먹을지도 모른다. 내년까지 취준을 하는 상황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장할 수도 없고, 즐거울 수도 없는 일을 계속 해나가고 싶지는 않다. 


 약 3주의 시간만 더 버티고 나가자. 

 즐겁지 않은 일이지만 며칠을 버틸 생활비를 벌 수 있고, 촬영이나 영상 문법에서 조금이라도 배울 것은 있을 것이다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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